요한복음 5장 1 – 18절 – 그가 누구신지 알지 못하니

베데스다 연못 가에사 그 물이 동하기만을 기다린 38년된 병자자 본문에 나온다. 그는 거동이 불펴하여 그 물이 동하여도 연못으로 들어 가지 못했다. 예수님께서 그 병자에게 먼저 다가가셔서 물으신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병자는 성경에 나온 예수님과 대화한 사람들 중 가장 특이한 대답을 한다.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병 낫기를 원해 어떤 사람은 자신의 집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집의 지붕을 뚫고 들어 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옷자락이라도 만지려고 했던 바로 그 예수님이 직접 찾아 오셔서 “네가 낫고자 하느냐” 묻고 계시는데 그는 자신을 연못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다고 불평하고 있다! 그 병자는 자기와 대화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전혀 몰랐던 것이다. 만일 그 병자가 자신과 대화하는 사람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고 많은 병자들을 고친 사람인 것을 알았다면 당연히 그는 예수님의 질문에 “예. 제가 낫고자 합니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는 예수님을 단지 연못 물에 자신을 넣어 줄 수 있는 건장하고 착한 청년 쯤으로 생각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서 병 치료를 위해 예수님께 부탁했다.

“보기 원합니다”, “걷기 원합니다”, “아이가 죽을 병에 걸렸습니다”, “귀신을 쫗아 주십시요”…

오병이어의 기적 이후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왕으로 삼으려고 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병 잘 고치고 기적을 일으키는 선지자 쯤으로 생각 했다. 만일 그들이 예수님이 그들의 죄를 사해 주실 수 있으시며 세상의 창조자시고 하나님께 갈 수 있는 유일한 길과 빛이 되심을 알았다면 그들이 단지 병 낫기만을 부탁했을까? 아마도 그들은 그들의 병을 고침받기보다는 영생을 혹은 죄사함을 구했을 것이다. 저들 역시 38년된 병자보다는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 좀 더 낫긴 했지만 예수님의 참 모습을 알지 못했다는 점에 있어서는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큰 변명거리가 있다. 그들은 신약성경을 아직 손에 들고 있지 않고 있었다. 바울의 가르침도 변화받은 후 제자들의 가르침도 없었다. 성령의 임재하심도 없었던 때였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우리 손에는 예수님의 가르침, 바울의 가르침, 제자들의 가르침 그리고 많은 영적 지도자들의 책들이 있다. 구약/신약 성경과 많은 신앙 서적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 잘 설명 해 주고 있다. 성경을 읽고 신앙 서적을 읽고 예배에 참여하여 목사님의 설교를 매 주 듣는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자녀의 앞 날을 평탄케 해 줄 수 있는 분? 내가 죄를 졌을때 기댈 수 있는 분? 나를 구원해 주신 분? 친구? 위로자? 과연 우리가 알고있는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혹시 38년 동안 병들었던 그 사람처럼 베데스다 연못이 동할 때 그 연못물에 우리를 넣어 줄 건장한 청년 쯤으로 생각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